감청리플릿표지(RGB).jpg리교 청년회가 걸어온 길

 

 

1) 역사의 어둠을 밝히는 감리교 청년(1897년-1919년)
  

국운이 기울던 시기에 시작한 감리교청년회는 1897년 5월 5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창립된 엡윗청년회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엡윗청년회는 원래 미국에서 1872년 니일리 목사에 의해 처음 조직되었다가 한국에서는 조원시, 노보을 선교사에 의해 조직된다. 이것이 최초의 기독청년조직으로 한국교회사에 남게 되는데 조직에 앞장선 한국인은 김기범, 이은승 전도사이다. 초기활동은 전도와 성경읽기, 절제운동등의 종미국식 민주주의에 기초한 봉건철폐운동과 사회봉사활동, 친교활동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1900년대에 들어서 일본의 청과 러시아를 제외한 독자적인 침략구도가 노골화되면서 많은 애국인사들이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애국청년들은 다른 조직에 비해 진보적이고 어느정도 치외법권이 보장된 교회에 터전을 잡기 시작하였다. 윤치호를 중심으로한 YMCA가 지식인과 명망 있는 상류층 인사들로 전개되면서 전덕기를 중심으로 한 상동교회 엡윗청년회는 서민들이 모여 살던 남대문 시장의 하층청년들로 구성되었고 여기에는 배재, 이화의 학생들도 다수 참여하였다. 엡윗청년회의 활동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초기의 계몽활동에서 더 나아가 반일 애국운동으로 이어졌고 1905년 11월 17일 일제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진남포지방 총무였던 김구 선생등 전국임원들이 총집결, 상동교회에서 구국기도회를 개최하고 일제히 대한문 앞으로 나아가 상소무효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이러한 운동은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으나 전덕기, 정순만 목사는 상동교회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위한 군사훈련과 민족학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이시기에 주시경, 이동휘 선생이 훗날 독립운동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2) 역사의 고난을 짊어진 감리교 청년(1920년-1977년) 

 

삼일운동 이후 일본 침략자들은 무단통치가 거센 저항을 받자 일부 기득권층(지주,상공업자,전고위관리)에게 일정한 경제 문화 활동을 보장하면서 불만을 무마시키고 민중에 대한 탄압은 그대로 유지하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실시하였다.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우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국외로 망명하거나 지하운동으로 전환하기도 했지만 일제의 탄압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민족운동의 형태보다는 일제와 타협 노선을 걸은 선교사들이 주장한 교회본령의 일에 충실하는 방식으로 활동하였다. 이렇듯 민족의 수난기에 민족운동의 거점에서 그 역할이 줄어든 엡윗청년회는 사회구제와 문화활동, 전도운동에 치우치면서 공교회의 일반 평신도 조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0년대 중반부터 공교회조직으로 자리잡게된 엡윗청년회는 조선감리교회가 신사참배(1938년 3차 총회시 양주삼 총리사의 제안과 총회회원 결의)결의를 하였을 때 공교회의 결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때 하나님과 역사를 위해 들불처럼 일어나 싸웠던 엡윗청년회는 말기에 이르러 깊은 역사의 어둠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 청년들이 일제가 패망하는 그날까지 얼과 혼을 빼앗긴 채 하나님을 버리고 신사참배에 참여한 기독교지도자들(임영신,정춘수,김활란)의 연설을 들으면서 만주와 중국대륙, 태평양의 오지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위한 총알받이로 또는 성의 노리개가 되어 죽어갔다. 

 

 

3) 해방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의 감리교 청년 활동14944_24745_4447.jpg

 

 해방을 통해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민족을 배신한 한국기독교와 그 지도자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했으나 남·북에 진주한 제국주의의 입장에 따라 각각 다른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남한의 친일 기독교인들은 이승만에 대한 지원활동과 일제말에 축출되었다가 복귀한 선교사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다시 교권에 복귀하였다.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특히 기독청년들중에 많은 수가 서북청년단이란 단체에 가입, 여순사태, 제주도4.3사태에 깊이 개입, 증오와 보복의 살육을 저질러 민족 분열의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열은 장로교회에서도 1950년부터 기장, 예장, 고신 등으로 분열을 거듭하고 감리교회도 분열의 난맥상을 드러냈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하에서 감리교청년들 역시 현실의 부조리에 힘껏 저항하지 못했다. 4.19당시 많은 사위대가 광화문에 있는 감리회관에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낸 것이 그 한 예이다. 하지만 감리교청년들은 5.16쿠테타 이후 폭압적인 유신독재의 만행을 지켜보면서 지난 수십년간의 침묵을 깨고 하나님과 역사 앞에 다시금 겨레와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역사 교회 청년"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4) 민주화와 통일 그리고 교회갱신을 위해 헌신하는 감리교 청년(1977년-1993년)

 

사회적으로 강압의 유신통치가 종말을 앞두고 탄압을 강화하고 교단내부는 분열과 통합의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는 1978년 2월 아현교회에서 600여명이 모여 역사, 청년, 예수라는 주제로 겨울선교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에서 전국연합회가 채택한 결의문은 감리교청년이 맞이할 80년대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주어질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예언적인 선언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감리교청년회(이하 감청)는 전국과 지역에서 조직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사업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임원과 사무원 구조와 사무국체제 정비, 상임총무제를 도입하여 업무의 효율성을 높여나가는 한편 운동의 지역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80년의 암울한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사회변혁과 교회갱신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잃지 않는 활동들을 전개하였다. 연회와 지방회 조직 활동의 활성화를 통해 명실상부 전국조직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앞으로 통일시대의 청년운동의 결의를 모아 민족, 평화통일을 위해 인간띠 잇기 대회를 (1993년) 개최하여 신앙인들이 앞장서서 통일을 준비하고 이루어내기 위해 첫발걸음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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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새천년을 향해 나아가는 감리교청년(1994년∼현재)

 

90년대의 감청은 민족의 현실과 고통받는 민중들의 삶에 함께하지 못하는 교회와 자신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민족의 새날"을 고백하였던 선배들을 삶을 이어받아 "주의 길을 예비하는 희년공동체"의 우리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1995년 희년대회를 기감, 예장,기장 청년들과 함께 개최하여 전국에서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결의를 다지고 결단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제 새로운 21세기를 맞아 청년리더쉽을 넘어 교회의 리더쉽 회복과 교회와 사회의 주역으로 거듭나는 감리교청년들이 되기 위한 기도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헌신과 봉사를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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